
나는 늦게 알았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안정에 안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삶이 평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서서히 자신을 잃어가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나도 지금까지는 남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경로 안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완전히 그 밖으로 나가긴 어려울 것 같다. 먹고사는 일, 관계, 책임 같은 것들이 생각보다 단단하게 묶여 있으니까.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진 것이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남들보다 더 나은 삶이라기보다, 내가 오래 견딜 수 있는 삶의 형식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내가 원하는 것’보다 ‘남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을 먼저 고른다. 그게 안전하고, 설명하기 쉽고, 실패했을 때 덜 부끄러울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납득 가능한 길을 오래 걷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내 삶을 내가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 위해 꾸미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의 나는 안정 속에 있었지만, 동시에 아주 조금씩 내가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거창한 자유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매일의 리듬이 내 감각과 지나치게 어긋나지 않는 삶, 원치 않는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기보다 스스로 선택한 관계가 더 많은 삶, 소비보다 사유와 표현이 조금 더 중심에 놓이는 삶을 바란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삶이면 좋겠다.
특히 관계에서 그랬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내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맞춰야 하는 관계는 결국 나를 소모시켰다. 반대로 큰 재미가 없어도, 말의 속도와 침묵의 온도가 맞는 관계는 오래 남았다.
요즘의 나는 ‘좋은 관계’가 무엇인지보다, ‘내가 숨을 덜 참게 되는 관계’가 무엇인지에 더 관심이 있다.
예전에는 이런 마음을 막연한 욕심이나 철없는 바람처럼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사람마다 버틸 수 있는 삶의 형식이 다르다면, 자기에게 맞는 형식을 찾으려는 일 역시 충분히 진지한 과제일 수 있다고.
요즘의 나는 더 잘 사는 법보다, 더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형태를 천천히 배우는 중이다. 아마 그게, 내가 나를 오래 데리고 가는 방식일 테니까.
이미지: Wikimedia Commons (CC0)